코로나 19 대유행 상황에서 “동양인 혐오”라는 소식이 종종 들려온다.
인간에 대한 혐오는 직관적이며, 폭력적이다. 그래서 위험하다.
눈동자가 작고 눈빛이 날카로워서 담비의 눈을 생각나게 했다. 담비라고? 그러고 보니 그건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동물이다(어쨌거나 나는 유대인을 만나 보지도 않고 혐오하듯 담비를 싫어한다).
프라하의 묘지 | 움베르토 에코
논리가 없다.
혐오를 유발하는 요인을 경험해본 적도 없는데, 이미 형성된 편견에 편승한다.
게다가 확신한다.
"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. 아주 지적인 동성애자들도 있잖습니까?"
"웃기는 양반일세. 꼭 이렇게 말하는 것 같소. '정직한 포주들도 있잖습니까'
'동성애자'란 말과 '지적'이라는 말 사이에 무슨 모순이라도 있다는 건지, 원."
살인자의 건강법 | 아멜리 노통
내재적 편견이 무의식적으로 드러난다.
말하는 입장에서는 그 속에 혐오가 반영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.
무지가 아니라 확신에 따른 결과이기 때문이다.
혐오의 대상만이 그 미묘한 뉘앙스를 감지한다.
코로나 19와 함께 들려온 혐오 정서는 무서운 현실을 깨운다.
평화로운 세상에서는 혐오는 범죄이며 경계해야 할 감정이라는 보편적 합의가 있다.
하지만 전시에 준한다는 팬데믹 상황에서 그 보편적 합의가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.
인간은 가장 깊숙한 곳에 혐오를 내장하고 있다. 항상 튀어나올 계기만을 기다리면서.
추악한 단어란 존재하지 않는다. 단어들을 상상력 없이 사용함으로써 혐오스럽게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.
미네르바의 성냥갑 | 움베르토 에코
그래도 희망을 찾는다.
아직은 혐오를 범죄시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고 믿는다.
혐오를 만드는 것이 우리 자신이라면, 적어도 하나는 줄일 수 있다.
적어도 나 하나는.
그렇게 시작한다.